주제선택 썰 마음을 연 세상을 바라며 sunfa 입니다, 1400247535@huobi.com 로그인 해보나 잘못된 이메일 주소가 나와서 접속이 안되니 접수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1400247535 로 접수해 주세요
눈을뜨니 해님이 방긋방긋 웃었다. 몸이 불편한 나는 무엇이든 일찍 해야 한다. 비장애인 똑같이 하면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 세수를 마친 후 텔레비전을 보며 식사를 하는데 “바람이 체감온도를 떨어뜨리니 두꺼운 옷을 입고 외출하세요.”일기예보 진행자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을 씻고 점퍼를 입고 문을 열었다. 나는 *활보가 없다. 느리지만 혼자서 할 수 있어서다. 햇빛이 방그레 웃자 ‘바람만 아니면 가벼운 옷을 입었을 텐데.’ 두꺼운 옷은 몸 움직임이 둔해져서다. 그렇지만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의 부러운 눈빛을 보자 철없는 투정이 사라졌다. 지하철을 타려고 개찰구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점점 가까이 오는 연인 한 쌍에 경찰을 본 범죄자라도 된 듯 급히 몸을 돌렸다. 열등감과 질투심만 아니었으면 별일 아닐 일이다. 40이 넘으면 초연해진다는데 요즘 갑자기 몸도 마음도 달아오른다. 이게 사춘기일까. 그렇지만 사춘기를 겪어야 하는 시절엔 너무나 조용한 내가 이상한 건가. 하고 생각했으나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니 고된 학창 생활로 그 나이 당연한 사춘기를 느낄 틈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장애의 몸으로 학교 가려고 새벽에 기상해야 했고 만원 버스에 시달렸으며 높은 학교 계단을 오르고 내렸다. 아무리 걷는다고 해도 비장애인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지치는데 비장애인 친구의 놀림과 사람의 측은함까지 오롯이 받아야만 했다. 그리 힘겹게 비장애인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자 더는 학업을 이어갈 기운이 없었다. 부모님은 대학은 다르다며 입시를 볼 것을 원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특수학교에 보냈더라면 편했을 테고 대학공부를 했을 텐데. 왜 비장애인 학교를 보내어 나를 망쳤는가!”원망만 했다. 그리 몇 년 백수 생활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함만 자아냈다. 그렇지만 사람에겐 한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날도 리모컨을 이리저리 굴리는 한심한 행동을 하는데 텔레비전에서 중증장애인이 시를 적는 모습이 강하게 머리를 강타했다. ‘아! 저거다.’ 그날로 시집과 문예 창작 책을 사서 공부했다. 시라면 장애가 있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 공부해서 습작한 작품으로 백일장에 나가서 여러 번 상도 받았다, 그리 오른 자신감에 정식 등단을 하려고 문예지에 응모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부족한 실력만 뼈아프게 느꼈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정진했다. 그러던 중 솟대 문학과 아동문예를 알았고 부끄러운 시와 동시를 응모해 꿈에 그리던 등단을 했다. 내 작품이 실린 문학지를 보는 기쁨은 세상을 다 가진 것이었다. 창공을 날지 않아도 좋다. 화려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작품 칭찬해 주고 감동하는 이가 있어서다. ‘젊은데 계단을 사용하지!’ 죄 없는 커플을 원망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천만다행으로 혼자였다. 연인보다는 덜 하지만 거북한 노인의 측은히 보는 시선과 매일 함께한 나로선 오랜 만의 창피함으로부터의 자유다. 나는 지하철에서 한국이 노령사회라는 걸 체감한다. 특히 부산은 노인 인구 1위다. 의자에 줄지어 앉은 노인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젊어선 나라와 자식에게 온몸을 바쳤지만, 지금은 빈곤과 젊은 세대에겐 식충이, 부도덕하고 고집 센 꼰대라는 비난을 듣는 처량한 얼굴이 되었다.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취업이 안 되니 집도 못 사고 연애도 결혼도 못 해서 이번 생은 망했다고 포기한 세대다. 그래서 가상화폐에 투자 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비장애인 청년보다 더 절박하다. 몸이 불편해 일은 꿈도 꿀 수 없으니 가상화폐투자 말고는 돌파구가 없다. 그리 두 세대와 상반된 맑은 하늘을 보는데 “여기 앉아.”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친절에 손을 저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한두 번의 일도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침울하다. 모르는 사람이 불쑥 건넨 “힘내세요.” 위로에 억지로 인사하는 내 마음은 눈물 홍수가 된다. 남의 감정 따윈 생각지 않고 마음대로 말하는 건 자기만족밖엔 안 되어 "이러지 마세요.” 화내고 싶지만, 그래도 선행이어서 묵묵히 참는다. 이렇다 보니 부모와 친한 사람 외엔 만나지 않는 소극적 성격이 되었다. 복지관 사랑방엔 이미 친구들과 요리를 가르쳐 주시는 자원봉사 아주머니가 있었다. “어허! 선생님보다 늦게 오다니 안 되겠네.” 아주머니의 장난스러운 힐책에 “나이가 드니 눈 뜨기가 힘들어서.” 나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나름 서둘렀는데, 다음엔 더 일찍 일어나야겠다. “내 앞에서 나이 말하나? 삼 층에 가서 칼하고 도마 가져와.” 그러면서 화이트보드에 떡볶이 요리법을 적었다. 나는 칼하고 도마를 가져와선 앞치마를 둘렀다. “먼저 재료를 다듬어라.” 아주머니의 말에 채소를 씻고 다듬었다. 손질이 끝난 재료를 고추 장물에 넣었다. “보글보글~” 요리가 완성되자 모두 떡볶이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오늘 떡볶이 맛있었나?” 아주머니의 물음에 “네!” 함께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먹었으면 청소하자.”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빗자루로 청소를 했다. 내가 청소하는 동안 아주머니와 휠체어를 탄 친구는 떡볶이를 들고 식당으로 갔다. ‘집에서 먹게 봉지에 조금만 담아 주세요.’하고 싶었지만, 다들 가만히 있어 먹음직스러운 빨간 떡볶이가 떠나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친구와 나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갔다. 숨찬 호흡을 노약자석에 앉아 가다듬었다. 아직 외톨인 나, 다정하게 사랑 꽃을 돌보는 연인만 보인다. 저들처럼 연예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일. 팔다리가 부러진 불량인형은 사람의 선택을 받지 못하듯 나를 선택할 사람은 없다. 어쩌겠는가. 전생의 업이라. 체념한 채 창밖 흐린 하늘을 보는데 세 명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이 탔다. 일반적인 젊은이로 여겼는데 한 친구가 손짓하더니 따라 두 명도 손짓했다. 청각장애인이란 걸 알고 손짓을 좇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장애인으로서 수화를 모르는 내가 부끄러웠다. 평소 수화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청각장애인보다는 절실하지 않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언어장애로 소통이 어려웠던 나는 저들 심정을 조금은 안다. 대표적으로 음식 주문을 하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끊어버리는 경우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끝까지 들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언제쯤 장애인이 행복한 세상이 올까. 난 가상화폐를 닮은 해에게 어서 장애인도 활짝 웃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 *활보 : 장애인을 도와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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